2024년 | 240824-일자산 둘레길(제328차 정기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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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영 작성일24-08-25 21:15 조회1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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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정]
1000 지하철 9호선 중앙보훈병원 3번
1010 일자산 해맞이 공원 입구
1130 둔굴(일부 산원)
1214 숲길교
1220 명일근린공원
1240 후미, 고덕역 인근 회식장소 쌈촌 명일점
[참가자]
김시영, 김용하, 김일동, 김정식, 문주일, 박중배, 박희수, 배진건, 서병일, 손정수, 손훈재, 송경헌, 신학수, 안종국, 양승판, 엄춘택, 유인식, 윤현로, 이상만, 이상한, 이석영, 이필중, 임경락, 임춘봉, 임충빈, 조건식, 전찬영, 최택상, 한성협, 홍기창. (30명)
[산장 인사]
산우회원 여러분, 무더운 날씨에도 많은 성원을 보내주셔서 깊이 감사 인사 드립니다. 오늘은 깔끔한 베트남 쌈밥이 어떠하였는지요? 항상 회원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저 저희 집행부는 노력하겠습니다. 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낙 수]
지난 6. 27.의 제326차 정기산행지인 아차산 트레일은 서울둘레길 5구간의 일부이고, 이번 일자산 트레일은 서울둘레길 7구간의 일부이다. 산행 전날인 2024. 8. 23.까지 33일간이라는 최장의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는 혹서기임에도 불구하고 제328차 정기산행은 30명의 산원이 참가한 역대급 규모였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7. 19.부터 7. 30.까지 일프스의 몽블랑 둘레길(Tour du Mont Blanc, TMB로 약칭)을 다녀온 후 체중 감소 기타 등등의 이유로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다소 고전 중이지만, 정기산행에 참가하는 것은 내 삶과 분리하기 어려운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40대 중반인 1997년에 동기 산우회가 창립되면서 바로 산우회에 가입하여 지금까지 등산이 취미로 된 것은 나이가 들어서 내가 선택한 일 중에 잘한 짓(?)이 분명하다. 등산 중에는 사진을 찍고, 귀가해서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이를 손질하고 정리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여기에 더해서 산행일기를 쓰기 위하여 인터넷의 여러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까지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망외의 소득이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힘든 산행을 같이 하면서 가지게 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 신뢰감은 다분히 정서적인 동기간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고 구체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낼모레면 팔순이 되는 내 둘째 누이가 결혼하여 차린 신접 살림집은 당시 입주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둔촌동 주공아파트 1단지였다. 둔촌(遁村)이라는 동네 이름이 특이하구나 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후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둔촌동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기 고향의 지명의 유래 이외에 다른 지명의 유래까지 아는 경우는 흔치 않다. 헌데, 아침에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집행부에서 “둔굴”로 갈 친구가 누구인지 확인할 때 비로소 “둔굴이 뭐지?” 라는 의문이 문득 들면서 둔촌동이라는 동네 이름까지 연상되었다!
그러나, 맨발로 걷기 위해서 등산화를 벗고 이를 배낭에 수납하느라고 출발이 지체된데다가 돌이 제법 많은 오르막 산길을 맨발로 걷는 데도 힘이 들어서 맨 후미에 뒤쳐져서 사진조차 몇 장 찍지 못하고 앞서가는 일행을 뒤쫓아 가는데 급급한 나머지, 둔굴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둔굴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지 못한 채 산행을 마치고 거의 맨 마지막으로 회식장에 도착하였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 어제 산행 중에 찍은 사진을 보니 일정을 정리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사진이 없어서 도대체 내가 어제 어느 길로 트레킹을 하였는지 더듬어보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둔굴의 유래와 위치 등에 대해서 인터넷에 유사한 글과 사진이 다수 올라 있다는 것이다.
고전용어 시소러스에 의하면 “이집(李集 1314~1387)은 고려 충목왕(忠穆王)~우왕(禑王) 때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사직하고 여주(驪州)에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침” 이라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집의 호가 바로 “둔촌”인데, 공민왕 때 신돈의 정책(鷲城의 黨禍)에 반대하자 신돈의 미움을 받게 되어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경북 영천의 친구 최원도의 집으로 도피하여 겨우 묵숨을 건졌다. 신돈이 주살되자 이집은 개경으로 돌아와서 판전교시사(정3품인 전교시의 판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경기도 여주 천녕현(현재 여주군 금사면 일대)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일생을 보낸 학자이다. 둔굴은 이집이 신돈을 피하여 잠깐 숨어 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집이 자신의 호와 사는 곳을 둔촌이라고 정한 뜻에 대해서, “둔(遁)이 나에게 덕(德)된 것을 장차 내 몸을 마치도록 잊을 수 없는 까닭으로, 나의 있는 곳을 둔촌(遁村)이라 하였으니 그 둔(遁)의 덕(德)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또한 그 위험에서 나와서 위험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붙여서 스스로 힘쓰고자 함이다. 둔(遁)은 맹자(孟子)의 지언(知言, 도리에 밝은 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뜻은 그윽히 이와 같이 취하였다."라고 한다(“둔촌 이집의 생애와 교유”-고혜령 저).
“맹자의 지언”이란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고자 한다면, 그가 뜻을 세우기까지 반드시 먼저 괴로움을 주고, 그 육신을 피곤케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한다. 그가 하려는 바를 힘들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마음을 쓰는 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참된 성품을 기르고, 불가능하다던 일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더 크게 키우기 위함이다”(맹자, 告子章)라는 유명한 문장을 말한다. 이집은 위 맹자의 말을 遁의 德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집의 저술로는 둔촌유고, 둔촌잡영 등이 있는데, 둔굴 인근의 시비에 새겨놓은 이집의 훈교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讀書可以悅親心(독서가이열친심)
독서는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으니
勉爾孜孜惜寸陰(면이자자석촌음)
너희들은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책을 읽어라.
老矣無能徒自悔(노의무능도자회)
늙어서 무능하면 쓸데없이 후회만 하게 되나니
頭邊歲月苦駸駸(두변세월고침침)
머리 맡의 세월은 몹시도 빨리 지나간다
遺子滿籝金(유자만영금)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남겨준들
不如敎一經(불여교일경)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도다
此言雖淡薄(차언수담박)
이 말은 비록 평범한 내용이지만
爲爾告丁寧(위이고정녕)
너희들을 위해 간곡히 일러둔다.
주1, 孜.....힘쓸 자.
孜孜...꾸준하고 부지런함.
주2, 駸.....말 달릴 침, 빨리 지나감.
駸駸...빨리 나아감.
주3. 籝.....광주리 영.
주4. 淡薄...담담하다,시들하다.
주5. 丁寧...태도가 매우 간곡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