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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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진 작성일14-08-14 11:18 조회1,001회 댓글0건본문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 ― 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진정한 용서를 위해
하느님의 지속적인 은총과 자비 안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쫙~’ 깔고 시작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경한 어조로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흔일곱은 ‘완전 중의 완전’을 뜻합니다. 그러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를 할 때 적당이 용서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두 번, 열 번 스무 번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끝도 없이 용서하라, 틈만 나면 용서하라, 용서를 습관화, 생활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밥 먹듯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군요. 삼시세끼 밥 먹듯이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말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호흡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내 삶의 모토처럼 여기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매일 매순간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평생 씻지 못할 모욕,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소중한 인생에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해를 끼친 그, 그러나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습관처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서에 앞선 마음의 정리가 요구됩니다. 때로 합당한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 습관적인 용서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결국 참된 용서를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힘겹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 어렵던 용서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 ― 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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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서를 위해
하느님의 지속적인 은총과 자비 안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쫙~’ 깔고 시작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경한 어조로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흔일곱은 ‘완전 중의 완전’을 뜻합니다. 그러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를 할 때 적당이 용서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두 번, 열 번 스무 번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끝도 없이 용서하라, 틈만 나면 용서하라, 용서를 습관화, 생활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밥 먹듯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군요. 삼시세끼 밥 먹듯이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말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호흡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내 삶의 모토처럼 여기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매일 매순간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평생 씻지 못할 모욕,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소중한 인생에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해를 끼친 그, 그러나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습관처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서에 앞선 마음의 정리가 요구됩니다. 때로 합당한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 습관적인 용서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결국 참된 용서를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힘겹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 어렵던 용서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